한판만 이기고 자자.

한판만 이기고 자자.

자정 무렵이면 내가, 혹은 같이 하는 친구가 꼭 하던 말이다. 이 말이 나올 때쯤이면 우리는 이미 한 판 이상 졌다. 묘하게, 이길 때에는 여러 판을 먼저 지고 나서가 더 재밌다. 이겨야 잠이 온다. 그중에서도 역전승이야말로 최고의 수면제다.

게임에서 역전승이 재밌으려면 조건이 있다. 상대 실력이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적당히 좋아야 한다. 이왕이면 양쪽 컨디션도 좋아야 한다. 어이없는 실수로 이기는 것보다 잘해서 이기는 게 낫다. 또 역전을 못 할 정도만 아니면, 불리할수록 좋다. 마지막으로 역전에서 내 역할이 커야 한다. 승리가 제일 중요하지만, 내가 잘해서 이기는 게 더 짜릿하다.

일도 비슷하다.

회사도 언더독일 때가 제일 재밌다. 상대가 처음엔 우리보다 적당히 잘해야 한다. 이왕이면 양쪽 모두 경쟁력이 있는 상태가 좋다. 경쟁자들이 너무 못하면 심심하다. 적당히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가 있어야 한다. 너무 어렵거나 너무 쉬우면 안 된다.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목표가 최고다. 팀원들은 끝까지 긍정적이어야 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으쌰으쌰 해내보자는 분위기, 다들 승리에 관심이 있는 상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내 역할이 커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실은 게임과 달라서 더 어렵지만 구체적인 승리 조건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실감하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승리여야 한다.

계속 이기는 판들도 기억에 남지만, 내가 가장 멋지다고 기억하는 건 늘 역전승이다. 그 에너지와 기쁨 때문에 나는 계속 게임을 하고, 스타트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