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프로그래머
프로그래밍이 카페 일만큼 흔해지면 어떨까요?
그런 상상을 해 봅니다. 프로그래밍이 지금보다 훨씬 대중화돼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쓰는 일이 되는 상상이요. 바리스타 일을 생각해 보면, 정해진 동선과 세팅된 머신, 주어진 원두만 있으면 커피를 내리는 일은 금방 익힐 수 있습니다. 신입에게는 정해진 절차를 따라가는 반복 작업처럼 느껴질 거예요. 하지만 카페를 운영하는 일은 그보다 복잡합니다. 차이는 재료보다 방식에서 생기죠.
그 차이는 커피 대회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회에서는 참가자가 직접 고른 원두로 경쟁하고, 다른 대회에서는 모두에게 같은 원두를 줍니다. 전자에서는 원두 선택과 그 원두를 다뤄 본 경험이 중요합니다. 후자에서는 같은 재료로 시작하니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가 실력을 가릅니다. 이 두 방식은 오늘날 개발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과 닮았습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개발이라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로 수렴하지 않고, 이렇게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의 AI 생태계도 커피 대회와 닮아 보입니다. 모델보다는 데이터와 플랫폼이 해자를 만들고, 그 격차가 경쟁력을 좌우하죠. 예전에는 큰 공사였던 로그 수집과 분석도 이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쉬워졌습니다. 이제 ‘좋은 원두’에 해당하는 데이터 접근과 기본 설비도 점점 주어진 조건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다음 해자였던 프로그래밍마저 간단한 동작이 되어 가고 있고요.
프로그래밍이 정말 카페 일만큼 흔해진다면 개발자는 어디로 수렴할까요? 저는 두 부류를 떠올립니다. 한 부류는 어떤 원두가 와도 맛있게 뽑아내는 사람입니다. 데이터 상태가 들쑥날쑥해도 파이프라인을 안정화하고, 관측과 실험으로 문제를 좁히며, 반복 가능한 품질을 만들어 내는 유형이죠. 다른 부류는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설득할지 아는 사람입니다. 제품 방향을 잡고, 팀과 이해관계자에게 선택의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며, 결과물을 상황에 맞게 전달하는 유형입니다. 전자는 데이터 엔지니어의 결에, 후자는 프로덕트 엔지니어의 결에 가깝습니다.
개별 기기와 원두를 다루는 일 자체는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대신 동선과 공간, 맥락이 더 중요해지고 있죠. 우리는 결과물이 어떤 맥락에서 의미를 가질지 결정하고, 그 선택을 설득하는 자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느리지만, 충분히 빠른 속도로요.